최승훈(지은이)의 말
인류는 삶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발생하는 질병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으며, 이는 전통의학의 형태로 계승 발전되었다. 그러므로 전통의학에는 인류 탄생 이후 축적해온 귀중하고도 방대한 임상 경험과 기술이 담겨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회남자(淮南子)』는 고대 중국문명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인 神農이 “하루에 70 가지 약물을 맛보았다” 는 기록을 통해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된 한약 관련 임상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君臣佐使이론에 따라 처방된 한약화합물이 양약보다 인체 내 대사산물의 화학적 구조에 더 유사하다는 최근 연구결과는 한의약의 가치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의학은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예방, 완화시키거나 치료하는 학문 (혹은 기술)이다. 의학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인체에 관한 객관적인 진리체계 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몸에서 나타나는 생명현상은 물리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함수의 추상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애매모호한 측면이 많고 절대적인 기준이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의학의 진리체계는 결국 우리 몸의 비질서(disorder)를 질서(order)로 환원시키는 능력을 우선적인 대안으로 삼을 수 밖에 없고, 어떤 방식이던지 비질서를 질서로 환원시키는 능력이 있으면 넓은 의미에서 의학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재 지구상에는 양의학과 함께 한의학 등 다양한 전통의학이 광의의 의학으로 공존하고 있다.
한의학은 중국에서 기원하여 조선시대 허준의 『동의보감』을 거쳐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이르러 독자적인 발전을 이룬 우리 민족 전통의학이다. 근대 서구 자연과학기술에 힘입어 양의학이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한의학은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각종 난치성 질환을 극복하기 위한 인체 스스로의 능력을 높이는 데에 무기력한 양의학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을 도구로 분석적、환원주의적、객관적 접근을 하면서 실험에 기반을 두고 질병 중심으로 적극적、공격적인 cure를 하고 있는 인위적 성격의 양의학과, 전통과학을 도구로 전인적、주관적 접근을 하면서 경험에 기반을 두고 인간중심으로 예방적、방어적인 care를 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한의학의 상호보완을 통해 인간과 질병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의학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다.
한의학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 관점과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첨단 자연과학과 충돌해서는 안되고 또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의학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질병으로 대표되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지며, 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속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자연의 산물을 활용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가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천년 동안 활용되고 발전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한의학은 인체에서 발생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최적의 형태를 지닌 기술과 도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한의학은 현대에도 주류의학의 한 축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다만 지속적인 발전과 더 보편적인 활용을 위해서 현대 과학기술과의 접목이 필요하다.
서구 과학문명이 밀려오면서 한의학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의학이 폐기되거나 사라질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속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한의학의 내용 가운데 의료로서 유용하고 가치 있는 부분만을 남기는 취사선택의 과정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한의계 스스로는 무엇이 남을 것이고 또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 백 년 전 중국에서 제기되었던 ‘폐의존약(廢醫存藥)’의 구호처럼, 침구와 한약 같은 실용 임상 지식과 기술만 선택적으로 남아 양의학으로 합병될 것이고, 침구와 한약의 작동원리를 설명해왔던 이론부분은 배척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 되면 결국에는 침구와 한약까지도 枯死시킬 것이며, 이는 역사의 후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전 한의계가 공유하고 있는 최소한의 이론적인 내용은 이제 스스로 확보해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앞으로 바람직한 통합의학의 시대에 모두가 공감하고 수용해야 할 기반 제공을 목표로 한다. 2009년 세계전통의학 문헌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최근에 국보로까지 지정된 『동의보감』은 400년전 동북아지역의 의학지식과 기술을 총망라하고 있다. 조목조목 밝혔듯이 대부분의 내용은 허준(許浚) 자신의 창의적 컨텐츠가 아니고 그때까지 전해 내려온 중국의학의 정수(精髓)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전통의학이라고 하더라도 국적과 민족을 초월할 수 있어야 그 보편적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책은 한의학에 대한 개론 수준에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초 이론 뿐만 아니라 자주 발생하는 질병 패턴 105개 증(證), 많이 쓰이는 한약(본초) 274종과 151개 대표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
30년전 대만과 중국에서 교환교수로 근무하면서부터 우리나라에도 한의학 전반을 성실하게 안내하는 한의학개론서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제 군자출판사의 도움으로 그 포부를 펼치고자 한다.
뜻을 공유하면서 그간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각 분야에 대한 교정과 감수를 담당해준 심범상 교수(경희대), 박경모 교수(경희대), 김기왕 교수(부산대), 인창식 교수(경희대), 오명숙 교수(경희대), 이의주 교수(경희대), 이상훈 교수(경희대), 김윤경 교수(원광대) 이시우 박사(한국한의학연구원), 김재욱 박사(한국한의학연구원), 이준환 박사(한국한의학연구원), 최고야 박사(한국한의학연구원), 그리고 남민호 박사(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한국 한의계를 대표하는 각 분야 전문가들과 2015년부터 33차례에 걸친 집담회를 거치면서 이 책의 출간을 위하여 한 뜻으로 작업할 수 있었음에 무한한 감사와 보람을 느낀다.
소개서문